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상세 == [[서유럽]] 세계에 근대의 문을 연 종교 전쟁이자[* 최후의 종교전쟁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아일랜드]] 일대에서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 반군 [[자코바이트]]간의 마찰이 있었기에 세계 최후는 아니다. 이후로도 [[북아일랜드 분쟁]]과 [[보스니아 내전]]에 [[나토]]가 개입하기도 했고...] [[서양]] 최초의 국제 전쟁[* 만약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국가로 본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비교도 되지 않게 연대가 앞선다. 당시로서는 [[세계대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만으로 한정하더라도 몰락기의 [[아시리아]]가 [[고대 이집트|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바빌로니아]]-메디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 사례가 있다. 흔히들 세계대전의 시초로 일컫는 [[7년 전쟁]]은 당시 [[에스파냐]],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등이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양]], 동인도 제도 같은 [[아시아]], [[아프리카]] 일대에서도 주로 [[이베리아 연합]] 아래 있었던 포르투갈 vs 한창 아시아, 아프리카 무역으로 뻗어 나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충돌이란 형태로 유럽의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식민 세력들이 충돌한, 진정한 의미로 범세계적 전쟁을 수반했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하는 것이다.]으로서 [[나폴레옹 전쟁]], [[세계대전]] 못지 않게 '''[[유럽사]]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대사건'''이다. ||[youtube(ZNHDiE17_Og)]|| 전쟁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신성 로마 제국]]의 구심력 부재''':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통일된 국가라기 보다 [[독일어권|독일]], [[저지대|네덜란드]],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북부]],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스위스|스위스 칸톤]] 등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국가들의 군주들과, 360개의 [[자유도시]]들의 모임이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분열과 반란의 조짐이 있었다. 그런데 이미 약했던 [[황제]]의 [[권력]]은 갈수록 약해진 반면 구성원들은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30년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종교 전쟁은 제국을 유지하려는 제국파와 독립을 추구하는 구성국가들간의 싸움으로 번졌다. 애초에 이들을 묶어주는 거의 유일한 명분은 제국의 황제가 가진 [[가톨릭]]의 대리자라는 타이틀인데, 때마침 로마 가톨릭의 권위는 추락하고 [[개신교]]라는 대안이 생기면서 이런 국가들의 독립 의지는 구체화되었다. * '''[[개신교]]의 대두와 [[자유도시]] 발달''': 당시 [[자본]]의 발달로 자유도시가 성장하자, 기술자들은 가톨릭의 중세적인 교리가 돈이 안 된다고 판단하여, 개신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서, 가톨릭으로 정치가 겨우 통합되어 왔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제도에서 다수의 자유도시들이 개신교도 교리를 지지하는 종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 '''유럽 국가들의 이득 계산''': 가뜩이나 유럽 중앙이었던 [[독일어권|독일지방]]은 국가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이 희박한 시절이었다보니, 모든 [[유럽]]의 [[귀족]]들이 독일 지방들에 하나씩 [[영지(역사)|영지]]나 [[공장]]이나 [[가족]]을 두고 있었던 지경이었다. 이러한 주변의 국가들은, 종교의 대립과는 관계없이 그냥 본인들의 이득에 따라서 각 독일 지방의 영지와 도시를 더 뜯어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에서 종교적 연대보다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근대적 형태의 [[국가]]로 이행해가는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결국, 이 전쟁은 [[가톨릭]](제국보수파)와 [[개신교]](자유도시파)의 영주들이 떼돈을 버는 [[자유도시]]들을 놓고 패를 갈라 싸운 것에 더 가깝다. 물론 명분은 종교 분쟁이었지만, '''가톨릭 국가임에도 이해 관계에 따라 개신교 연합으로 참여한''' [[프랑스 왕국|프랑스]] 때문에 종결된 전쟁이기도 했다. 이 전쟁의 결과물인 [[베스트팔렌 조약]] 역시도 독일어권이 분열되기를 바랐던 프랑스의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 [[추기경]]이자 [[실권자]]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세력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독일어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서 '''"종교가 뭐든지 간에 독일어권이 하나로 뭉치면 큰일난다."'''라는, 선견지명으로 개신교 동맹을 도와서 '''종교의 자유'''라는 명선언문으로 독일어권을 계속 분열시키려 하였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침공한 것은 당시 페르디난트 2세의 야심이 큰 문제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상륙하기 전까지 개신교 동맹들이 워낙에 허접하다보니,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을 전 독일어권으로 확대하고자 하여 단일한 보편 제국을 만들고자 하였다. 사실 야심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그 이전까진 무패에 가깝게 계속 황제군이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확장이 실제로 가능할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동맹들이 생각했던 이익을 내팽겨치곤 멋대로 영지를 나눠주거나 하는 일로 작센 선제후 같이 중립을 지키던 영방 제후들까지 자극하여 쓸데 없이 등돌리게 만든 것도 이런 무패연승의 전적 때문이었다. 구스타브 2세의 등장 이전까지는 제국의 그 누구도, 심지어는 개신교 동맹군들마저 황제와 가톨릭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총 4번에 걸쳐 따로 벌어진 전쟁이 서로 깊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30년 전쟁'''으로 묶어서 호칭하고 있다. [[루스 차르국]], [[잉글랜드 왕국]], [[오스만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이들도 루스 차르국을 제외하면 간접적으로 전쟁에 관여하였는데 친합스부르크 성향이 강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리소브지치'(Lisowczycy)라는 용병대로 가톨릭 편에 뛰어들었으며,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왕국, 특히 강성 칼뱅파 장로회가 지배적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동군연합]]인 [[스코틀랜드]]의 경우 또한 주로 스웨덴군 지휘 아래 많은 용병/의용대를 파견했다. 오스만 제국 또한 [[헝가리인]]의 자치국이자 봉신국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의 공작 [[베틀렌 가보르]]를 통해 반합스부르크, 개신교 동맹군을 지원하였다. 다만, 당시 오스만 제국을 지배하던 [[무라트 4세]]는 [[사파비 왕조|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더 큰 적으로 여겨 유럽 방면에서의 불필요한 행동은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전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버린 탓에 이 전쟁은 본격적인 세계 외교사의 기점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30년 전쟁을 평가하자면 종교전쟁으로 시작해서 [[쩐의 전쟁]]으로 끝난 전쟁이라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